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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여행

바오로는

성전에서 체포

사도 성 바오로(+67)가 된 타르수스의 바오로(본명은 사울)는 열두 사도와는 달리 돌아가시기 전 살아있을 때의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혼자서 체험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타르수스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예루살렘으로 가서 대랍비 가말리엘 곁에서 율법에 대한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몇 년 지나지 않아 타르수스로 돌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동안에는 예루살렘에 없었고, 그리스도의 수난 후 몇 년 뒤에 예루살렘으로 왔다.

이 시기에 사울은 사도행전에 적혀있듯이(사도 8,1-3) 적극적인 바리사이였다. 그는 스테파노를 돌로 치는 현장에서 돌 던지는 이들의 옷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막 퍼져가기 시작하고 확고해져 가는 ‘예수의 종교’에 그는 열정적이고 단호하게 반대하여, 다마스쿠스로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는 임무를 자청하게 된다.(사도 9,2)

그의 회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났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내려와 그를 감쌌다. 그리고 그는 말에서 떨어지며 한 목소리를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한 채 사흘 동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고 배고픔과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그때,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이 받은 선물을 깊이 되새기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가기를 결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3년을 묵상하며 지냈다.

그는 이 빛으로 위로를 받고 피정을 한 후 다마스쿠스로 돌아와서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는데 이는 이방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방인들은 그가 자기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 그를 죽이려 했고, 그는 도망을 가야만 했다.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도망 와서 보름동안 머무르며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자신의 새로운 삶을 보여 주었다. 사도들은 그를 이해하고 그와 함께 머물면서 날마다 예수님에 대해 말해주었다. 하지만 숨막히는 박해의 기억이 있었던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러나 권위 있는 레위 가문 출신인 바르나바의 보증 덕택에 의심은 사라지고 그는 받아들여졌다.

예루살렘에 머무르는 보름동안에도 바오로는 회개를 입증할 일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선교활동은 유다인들을 참지 못하게 했고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를 얻지 못하였다. 결국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카이사리아를 거쳐 고향인 킬리키아의 타르수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천막 짜는 일을 하였다.

그 후 바르나바가 사도들로부터 안티오키아의 신생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돌보라고 파견되어 바오로에게 가서 자신을 도와줄 것을 청할 때까지 즉, 39년에서 43년 사이에 그의 활동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바오로는 이제 자신의 사명이 유대인에게 있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있음을 확신하고 늘 불리던 사울이란 이름을 버리고 안티오키아로 간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다.

예언자가 말하였듯이 바오로를 통해 불과 몇 년 만에 강렬한 모습으로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법은 시온에서’나오게 되었다.

 

선교 여행

제 1 차 선교 여행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키프로스로부터 아나톨리아에 이르기까지 시나고가를 들르며 열정적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공동체를 세우고 치유를 일으켰다.

 

 

제 2 차 선교 여행

50년에 바오로는 소아시아를 향한 새로운 여행을 결심한다. 사도 여행은 53년까지 3년간 이루어졌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에 이르러 바오로는 필리피에 복음을 전하였고, 거기서 두 사람은 채찍을 맞고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한 밤중에 지진이 일어나고 간수가 회개하여 자유롭게 되어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오면서 테살로니카, 베로이아, 아테네를 들렀다. 안티오키아에서 믿는 이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christianos)’이라 불리웠다.

제 3 차 선교여행

53-54년 사이 바오로의 세 번째 선교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는 우선 에페소로 가서 3년을 머물렀는데 그의 설교는 아르테미스 여신 경배가 줄어들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에페소에서 있었던 성직매매(il commercio sacro)는 없어졌고, 그것은 민중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때문에 바오로는 다치지 않기 위하여 그곳에서 떠나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소아시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 예감하면서 애정을 갖고 방문하였다.

마지막 도착지는 카이사리아였다. 그곳에서 예언자 아가보는 그에게 체포와 구금을 예언했고 58년 5월 말경 예루살렘에 이르러 마지막 여행의 수확을 바쳤다.  

 

1. 예루살렘에서 공부한 히브리 사람 사울

바오로는 기원전 10년경 킬리키아 타르수스의 히브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울’이라는 성경의 이름과 ‘바울’이라는 로마식 이름을 받았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 있었고, 우리 선조들의 법을 정확하게 지키도록 교육 받았고, 하느님께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였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사도 23,6)이고, ‘여드레 만에 할례 받은’(필리 3,5-6)자이다.

2. 박해자

스테파노의 순교 때 박해자들의 겉옷이 사울이라 불리는 젊은이 곁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 살인을 정당화하고 교회를 거슬러 폭력적 박해를 가하는 이들 중의 하나였다.

사울은 열정적으로 ‘조상들의 전통’을 지켰고(갈라 1,14) 심지어 ‘젤롯당’이었을 수도 있다(사도 22,3). 이것이 스테파노처럼 성전을 위협하는 그리스 선교사들을 잡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파견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고문도 행하였다.(참조: 사도 25,6.9-11)

이것이 다음 두 가지 이상한 사건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줄 수 있다. 즉, 바오로는 예루살렘 교회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도망 다녀야만 했다.(사도 9,26-30) 또한 후에 로마인의 감옥에 갇혀있던 바오로를 죽이려고 40명의 히브리인들이 맹세했다(사도 23,12-22). 젤롯당은 그들의 맹세를 어긴 이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3. 회개 / 부르심

사도행전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그가 들은 유명한 말을 전해준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바오로 자신이 전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은 커다란 내적 혼돈을 보여준다.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의 ‘부르심/회개’를 보면 모두 하나의 사명을 받는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7)

사울의 근본적 ‘회개’는 그에게 종교를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는 더욱 히브리적으로 느꼈다. 왜냐하면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달자가 된 그는 로마에서 마지막 불림을 받을 때까지 히브리인들에게도 기회가 닿는 대로 설교를 계속하였다. 바오로의 회개와 세례는 그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참되고 올바른 자리를 찾았음을 의미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갈라티아서를 따르면 33-35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시기는 초대교회가 ‘베드로와 열한 제자들’(사도 2,14)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에 설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이다.

4. 예루살렘: 베드로와의 만남

‘3년이 지난 뒤’ 사울은 게파(베드로)를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리고 ‘보름동안 그의 곁에 머물렀다’. 베드로는 바오로가 알지 못하는 예수님에 관한 구전 전승과(1코린 11,23-35) 예언서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해설을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전하였다.

그 방문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바오로가 만난 유일한 다른 지도자는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였다. 그는 모교회에서 영적으로 풍요로워 졌지만, 자신의 젤롯당원 혹은 열정적이었던 과거 때문에 거기에 받아들여지지는 못하였다. 그리스 말을 하는 히브리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으므로 곧장 도망가야 했다.(사도 9,29-30)

타르수스로 가서 자신의 믿음을 시나고가에서 선포하기를 계속하며 천막 짜는 일을 다시 하였다.(사도 18,3) 그때는 인격적인 성숙을 위한 시기였다.

5. 안티오키아: 선교여행의 시작

40년경 바르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로 파견된다. 거기에는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그리스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있었는데 그곳과 손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는 바오로의 도움을 얻기 위해 타르수스를 들러서 그와 함께 하나가 되어 공동체를 이끌어 복음화에 커다란 성공을 이룬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시나고가에서 모이지 않는 첫 공동체였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인들에게도 설교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혼합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안티오키아에서 처음 소개되어 사용된 ‘그리스도인(christianos)’이라는 명칭의 고안은 이곳에서 사울이 행한 설교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중 하나이다. 그때부터 안티오키아 교회는 복음전파의 중심지가 되었고 유다인의 삶과 성전으로부터 독립되었다.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하나의 양성과정과 하나의 견고한 조직을 갖추었다. 그래서 기도모임 중에 받는 공동체의 영감은 개인적 부르심을 확인해 주었다. 성령의 음성은 그들에게 들려왔다. “바르나바와 사울을 뽑아 내가 부른 이들을 위해 일하게 하라.” 그래서 공동체는 기도하고 단식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키프로스를 향한 바다로 갔다. 그들에게 이러한 방향으로 가게 한 것도 성령이었다. 섬의 동쪽 살라미스의 시나고가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어서 서쪽 파포스로 갔다. 루카는 이때부터 사울을 바오로라는 로마식 이름과 함께 부르며 이방인들을 향해가는 그의 사명에 꼭 맞는 이름을 가졌음을 강조한다.

6. 소아시아에서 교회의 설립

그는 타우로 너머 이방인의 땅 세바스토폴리로 가는 길의 로마 전략도시 네 곳으로 들어갔다. 루카는 로마의 새 식민지인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시나고가에서 바오로가 행한 선교 설교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는다. 히브리 주류의 무례한 접대를 당하기 전에 바오로는 이방인에게로 갔다.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코니아, 리스트라, 데르베로 갔다. 두 사도는 신생 공동체를 더욱 굳건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이교에서 온 새 입교자들과 유다교에서 온 신자들이 함께 살기를 격려하여 그들이 설교한 시나고가 대표들의 적대감을 사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범을 따라 ‘원로’들을 지명하였다.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고 시리아의 대도시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7. 예루살렘 공의회

48년경 안티오키아에서 비-유다계 신자들의 할례에 관한 문제가 생겼다. 유다계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얻어진 자유’를 주장하였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이방계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예식을 요구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공동체는 사도들과 예루살렘 원로들에게 설명하기를 결정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그리스인 티토를 대표 사절단으로 예루살렘에 보낸다.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은 ‘할례 받지 않은’ 티토를 맞아들이고, 은총이 주는 자유에 관하여 바오로가 전하는 말이 유효함을 인정한다. 회의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책임을 확인하고 할례받은 이를 위한 베드로의 선교 소명과 할례 받지 않은 이를 위한 바오로의 소명을 확인한다. 이렇게 해서 야고보와 게파(베드로)와 요한은 히브리인들을 위해 일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을 위해 일하는 선교 영역의 구분이 이루어지게 된다.

8. 안티오키아의 사건

베드로가 안티오키아를 방문했을 때 일어난 일은 바오로의 올바름을 증거한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은 변할 수 없는 진리였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당시 할례받은 히브리 그리스도인은 부정을 벗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식탁에 앉을 수 없었다. 그때 안티오키아에 있던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더 우선함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베드로는 이 원칙을 어겼다. 예루살렘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야고보가 보낸 그리스도인들이 도착했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을 숨겼다. 그러나 바오로는 자신을 드러내며 “행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틀렸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예루살렘의 결정은 바오로가 설교하여 길러 온 소아시아의 신생교회 공동체의 존재를 보호해 주었다. 그렇지만 이 할례자와 비-할례자 사이의 완전한 친교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부차적인 것인가? 바오로는 신앙 안에서의 새로운 삶과 성령의 선물과 거룩한 약속이 율법보다 우선임을 주장하였다. 야고보와 예루살렘교회, (야고보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주저하는)베드로와 바르나바, 그리고 예루살렘의 결정을 따르는 안티오키아 교회 자체에서도 갈등이 생겼다. 오직 실라스만이 그것을 따르고자 했다(사도 15,40). 15년 동안의 긴 수련의 기간이 지난 뒤 바오로에게는 새로운 시기가 열렸다.

9. 리디아와 필리피 교회

트로이아에서 바오로는 환시 중에 “마케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는 한 마케도니아인의 요청을 들었다. 그는 곧장 그리스로 가는 배를 탔고, 가다가 필리피에 내렸다. 그곳은 상업도시이고 로마의 식민지로 옛 군인들과 라틴계 농부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유다이즘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자색 옷감 장수인 리디아의 집안이 전부 세례를 받고 선교사들이 머무르는 동안 그들을 보살폈다. 그 집은 빠르게 형성된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고, 물질적인 도움과 사랑을 바오로에게 주는 가장 충실한 공동체의 하나가 되었다(2코린 11,8). 몇 년 후 에게해 지역을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바오로는 필리피 공동체와 함께 파스카를 지내기를 원하였다.

바오로는 지역 권위자들에 의해 어떤 변절자로 고발당한다. 그 당시는 유다이즘과 크리스티아니즘이 잘 구분되지 않았으며 더욱이 유다이즘은 어떤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바오로는 실라스와 함께 처음으로 옥에 감금된다. 한 밤중에 그들이 기도와 찬미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문들이 열려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문이 열려있는 것을 확인 한 백인대장은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우리는 모두 여기 있소.”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백인대장은 자기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게 되었다. 바오로는 리디아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의 석방이 비밀스럽게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승리’의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로마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였다.

10. 테살로니카: 예배의 장소인 가정

이번에는 바오로가 시나고가에 가서 늘 하던 것처럼 ‘3주 동안 성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부활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자, 히브리인들은 그에 반대하여 그가 황제의 법을 거슬러 소동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이에 형제들은 바오로를 베로이아로 떠나도록 계획해 주었다. 하지만 테살로니카의 히브리인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바닷길로 아테네까지 한번 더 도망가야 했다. 거기서 실라스와 티모테오를 기다렸다. 얼마 후 테살로니카 공동체는 바오로가 처음으로 쓴 두개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그 편지에서 사람들은 신생교회에 대한 염려와 열의를 읽게 된다. 테살로니카에서 야손의 집은 필리피에서 리디아의 집과 같이 사용되었다. 집 혹은 가정은 예배와 기도의 장소가 되었고 사회적 관계와 일이 이루어졌다.

11. 아테네: 우상들

헬레니즘의 근원지인 아테네는 로마의 모든 황제가 공부하러 오는 곳이다. 바오로는 그리스의 문화를 접하며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며 떨었다.’ 그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시나고가와 아레오파고스 광장에서 설교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관련이 적었다. “나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쓰여진 글도 보았습니다. 그 신을 여러분에게 알려주겠습니다.”(바오로 자신은 이 일을 전해주지 않는다. 이런류의 설교는 무엇보다 1세기 말 희랍교회의 첫 선교사들이 스토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이방인들 앞에서 행한 설교를 생각나게 한다. 십자가와 구원과의 연결이 없는 것을 보면 바오로가 행한 설교인지 의심이 간다.)

12. 코린토

아프로디테 여신 숭배가 피어나 있는 대도시 코린토에서 바오로는 프리스퀼라와 아퀼라를 만난다. 그들은 히브리인 부부로서 49년 ‘히브리인들은 계속해서 기름부음 받은 자에 의해 세워지므로’(Svetonio, Claudio 25,11) 안 된다는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추방령에 따라 로마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54년에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난 다음 감옥에 갇힌 바오로를 시중들러 로마로 간다. 그 사이에는 바오로와 함께 에페소로 가서 교회를 맡아 지키고 복음을 전하였다.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무가 대가없이 하는 것임을 밝히고자 랍비의 방식으로 ‘일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천막 고치는 일을 두 부부와 함께 하였다. 안식일에는 쉬지 않고 시나고가에서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아 사상을 전하고자 애썼다. 시나고가의 회당장인 크리스포스는 자기 온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방인도 받아들인 코린토 교회는 대단히 빠르게 발전하였다. 그 교회는 클라우디우스의 추방령으로 로마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된 이들의 거처가 되었다. 바오로는 거기에 18개월 동안 머물렀다.

그곳에는 자주 반복되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시나고가들의 권위가 문제였는데 시나고가에서는 특권층들에게 혜택을 베풀었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히브리 종파와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세네카의 형제인)그들은 결국 갈리오 총독에게 바오로가 불법적인 종교 선전을 한 것으로 고발하였다. 철학자 세네카의 형제인 갈리오는 이 고발을 접하고는 재판을 열기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바오로는 히브리인이고 그의 눈에는 이것이 시나고가 내부의 문제로 비춰졌기 때문이다(사도 18,12-16). 그때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와 에페소로 가기 위해 프리스퀼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탔다. 그 둘은 장차 에페소 공동체의 핵심이 될 사람들이었다. (이 두 번째 여행이 끝날 무렵인 52년경에 그들은 ‘예루살렘 공의회’에 많은 이야기들과 안티오키아의 사건을 전하였다.)

13. 에페소: 프리스퀼라와 아퀼라가 이끈 교회

에페소는 문화, 종교, 상업적으로 동서가 교류하는 중심지였다. 바오로는 2년 이상을 이곳에 머무르면서 교회를 세웠다. 유다이즘과의 대립은 당시의 다른 종교들과 만날 길을 열어주었다.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는 일이 성행하던 에페소에서 프리스퀼라와 아퀼라는 공동체를 열정적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앞으로 아폴로가 와서 활동할 길을 닦아놓았다. 아폴로는 에페소와 코린토에서 교리교사로서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된다.

14. 밀레토스: 교회의 구조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령에 사로잡힌’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불렀다. 그들에게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전하고 자신의 사명을 명확히 한다. “가거라. 나는 너를 멀리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려고 한다.”(사도 22,21) 그들에게 깨어 일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도우라고 권고하였다. “받은 것을 주는 데에 더 큰 기쁨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그들이 교회를 세울 것을 부탁한다. 아니 교회를 세울 능력이 있는 말씀의 힘을 그들에게 맡긴다. 말씀의 능력은 가장 중요하고, 그 힘이 교회를 세운다.

이 대목은 감동적으로 끝난다. 교회공동체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바오로를 껴안았다. 모두는 하느님과 말씀에 자신을 맡긴다. 이 이야기는 교회의 제도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바오로에게 불리운 원로들 혹은 장로들은 영적으로 양육하고 이끌도록 임명된 사제들과 주교들이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을 보살피며(주교episcopus라는 말뜻이 그렇다.) 오직 성령으로부터만 신자공동체를 위한 능력을 받는다.

자신의 ‘독립적인’ 사도직 수행 과정 중과 갑작스런 상황 앞에서 바오로는 일치된 공동체 안으로 믿는 이들을 다시 모으는 자신의 소명을 입증하기 위해 교의에 대한 전반적 재해석을 해야만 했다. 결국 바오로는 성공했다. 어디든 그는 가는 곳에서 시나고가의 법적 구조를 넘어서서 유지되고 발전 될 수 있는 더욱 일치된 교회를 세웠다.

15. 예루살렘: 교회의 으뜸

바오로는 이방인을 위한 자신의 선교 사명에 관해 원로들에게 보고하기 위해 세 번째로 예루살렘에 들어간다. 그는 자신이 세운 교회를 대표할 사절들을 이끌고 갔다. 대부분은 이방계-그리스도인이었지만 티모테오와 같은 히브리계 출신 제자도 있었다. 티모테오는 이방계 공동체 가운데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는 시나고가와 논쟁하는 지역 공동체의 유명한 지도자가 된다.(1코린 12-14) 또한 그는 하느님께서 선택한 백성 공동체의 존엄성을 모두 잘 지킬 것을 요구하며 신명기의 전통에 따라 각 교회에 이름을 준다. 그것은 처음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권한이었다. ‘바오로’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1코린 1-21;2코린1,1)로서의 권위를 이방인들에게 행사하는데 아주 꼭 맞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때 유다교의 중심지인 야고보가 이끄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수많은 ‘믿음을 받아들인 수많은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이 선조들에 일치해 있음을 증거하고자 했다. 그는 코린토인들에게 “나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전으로 가서 ‘나자렛 사람들’과 함께 정화예식을 치루었다. “모든 이는 그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체포된다.

16.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체포

모든 것이 폭발직전이었다. 바오로의 설교는 시나고가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그리스도교의 성장은 법과 제도를 위협하였다. 바오로가 성전에 와 있는 동안 정화 예식의 7일째와 8일째에 몇몇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는 아마도 비-히브리계 그리스인들과 함께 했을 것이고 그것은 성전을 속되게 하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소아시아 출신의 몇몇 히브리인들은 그것을 알고 군중을 선동하여 성전으로 가게 하였다. 군인들과 정치인들이 달려온 덕분에 바오로는 죽음을 면하였다. 그래도 무언가 말하기를 원하며 그는 ‘몇 발짝 앞으로 나와... 침묵한 뒤 히브리말로 군중들에게 말하였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은 충실한 히브리인임과 자신의 삶에 영감을 주고 이끌어가게 된 다마스쿠스로 가는 갈 위의 갑작스런 만남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이 히브리인들 앞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성전에서 내가 기도하고 있을 때 나는 갑자기 탈혼 상태에 들어갔고, 내게 말씀하시는 그분을 보았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서둘러 떠나라. 그들은 나에 대한 너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고 하시고, 이어서 ‘나는 너를 멀리 이방인들에게로 보낸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들이 군중에게 또 다른 자극이 되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하신 약속이 모든 이에게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수감과 심문의 시기: 예루살렘, 카이사리아, 로마

- 바오로는 예루살렘 성에 끌려갔다. 하지만 로마시민이었기 때문에 채찍질은 받지 않았다. 첫 심문은 산헤드린 앞에서 받았다.

- 히브리 젤롯 당원들이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카이사리아로 이감된다. 두 번째 심문은 펠릭스 총독에게 받는다.

- 세 번째 심문은 2년 후 그의 후임자인 페스투스에게 받는다.

- 네 번째 심문은 아그리파스 2세 앞에서 받게 된다. “이 사람은 감옥에 갇히거나 죽음에 처할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 만일 자신이 카이사리아에게 항소하지 않았다면 풀려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로마로의 호송 여행

예루살렘 공동체의 일부는 함께 기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적대자들의 긴장감을 보아야 했다. 그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의심은 대단히 많았다.

바오로는 루카와 아리스타르코스와 함께 로마로 이송되기 위해 백인대장 율리우스에게 보내졌다. 당시 여행은 대단히 모험적이었다. 파선되어 몰타에서 멈추기도 하였다. 여기서 죄수 바오로는 276명의 선원들 가운데 가장 대담해 보였다. 그는 세 번의 파선(2코린 11,25)을 겪었고 바다에 익숙하였다. 특히 하느님께서 보내셨다는 확신이 있었다. “너희가운데 아무도 생명을 잃지 않고, 배만 부서질 것이다.”하고 함께 가는 이들에게 확신하였다. 모든 것이 절망적일 때 “내가 속하고 섬기는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나에게 말하였다. 두려워 하지마라 바오로... 하느님이 너와 함께 항해하는 모든 이의 생명을 너에게 맡기셨다.”

고요하고 단순한 이 섬에서의 체류는 (“원주민들은 아주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커다란 불 주변으로 둘러 모였다.”) 이방인의 세계가 복음에 보여준 환대를 상징한다. 여기서 바오로는 기적을 행한다. 바오로가 불을 붙이는 동안에 뱀이 그의 손을 물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런 고통 없이 화로속에 뱀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섬의 병자들을 고쳐주었다.

61년 바오로는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간다. 테베레 강 옆(지금의 히브리지역)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2년 동안 감시를 받으며 재판절차를 기다리는 동안도 복음을 전하며 편지를 썼다. 그 재판은 고소자의 부재로 말미암아 김이 빠져있었다. 하지만 64년 화재 이후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화재의 범인이라고 고소하였다. 그래서 바오로는 체포되었고 철창에 갇혀 단두형을 받았다. 그리고 오스티엔세가에 있는 아우렐리아 담벽의 바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 로마에서의 순교

계약이 모든 이에게 열림

황제의 도시에서 바오로가 한 마지막 말들이 사도행전에 적혀 있다. 그것은 히브리인들을 향한 부름이었다. 자신의 사명이 마쳐갈 무렵, 주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원하신 그는 내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이라도 잃기를 원치 않았다.(마태 25,40)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 때문에 나는 이 쇠사슬을 지고 갑니다.” 바오로는 마지막으로 강력히 자기 민족의‘회개’를 요청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계약이 이제 모든 이에게 열려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영적 도전이었다.

바오로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발전을 촉진하였고, 그의 표현대로 ‘민족들의 빛’(이사 49,6;사도 13,47)이 된 부활에 대한 커다란 증언이 멀리, 그리고 넓게 전해지게 하였다.

<본 강의는 ‘바오로의 해’ 홈페이지(www.annopaolino.org)에서 제공하는 바오로 관련 자료를 서울대교구 사목국 선교전례사목부에서 번역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