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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강의 : 타르수스의 바오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직접 부르신 12사도에 대한 묵상을 끝냈습니다. 오늘부터는 초대 교회의 여러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그들은 주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삶을 바쳤습니다.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그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사도 15,26)이라고 소개합니다.

그중에 제일 으뜸 인물은 의심할 여지없이 ‘타르수스의 바오로’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불리었고 참된 사도였으며, 교회 역사안에서 가장 큰 별로서 빛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를 천사와 대천사들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소개합니다.

단테는 사도행전을 따라 신곡에서 그를 ‘선택된 그릇’(vaso di elezione 사도9,15))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한 도구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열 세 번 째 사도’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불리어서 참된 제자임을 여러 번 주장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다음으로 제일번’(il primo dopo l'Unico)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확실히 예수님 이후로 그는 아주 탁월한 인물입니다. 그에 대해 우리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루카가 사도행전에서 이야기 해주는 것 뿐 아니라 바오로 사도 자신이 직접 보낸 편지들도 많이 있으며 이 편지들은 그분의 인격과 사상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루카는 그의 이름이 본래 사울(사도 7,58; 8,1 등)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구약의 사울(사도 13,21)과 같은 이름으로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으며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사이에 위치한 타르수스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일찍 예루살렘으로 가서 대랍비 가말리엘 아래에서 모세의 율법을 깊이 공부하였습니다.(사도 22,3) 또한 천막을 고치는 힘든 기술도 배웠는데 그것은 나중에 그가 교회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사도 20,34; 1코린 4,12; 2코린 12,13-14)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고백하는 이들의 공동체를 알게 된 것은 그에게 결정적인 일이었으며, 그들로부터 새로운 신앙의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신앙은 하느님의 법 자체보다 오히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격에 더 큰 중심을 두었습니다. 그분은 죄를 사해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열성 유다인들처럼 그도 이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거부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 밖에서 조차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박해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30살의 사울을 ‘차지’(ghermito da Cristo 필리 3,12)하였습니다.

 루카 사도가 아주 상세하게 전해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부활의 빛이 사오로를 비추고, 사오로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합니다. 사오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자신이 본 것(1코린  9,1)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비추심(2코린 4,6)과 계시,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과의 만남 안에서의 부르심(갈라 1,15-16)에 대해 말합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불리움 받은 사도요(로마 1,1; 1코린 1,1), 하느님의 뜻에 따른 사도임을(1코린 1,1; 에페 1,1; 콜로1,1) 분명히 밝힙니다. 또한 자신의 회개가 생각이나 묵상의 발전에 따른 결과가 아니고 하느님의 개입과 예견할 수 없는 거룩한 은총의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그 후 처음으로 그는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히게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게 됩니다.(필리 3,7-10). 그때부터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만 진력하게 됩니다. 그는 오늘도 아무 유보 없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열정적 사도입니다.(1코린 9,22)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습니다. 삶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친교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으로 모든 가치가 회복되고 더렵혀진 것들이 정화됩니다.

바오로의 사도직을 특징짓는 근본적인 또 하나의 교훈은 우주적 숨결(il respiro universale)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겪는 문제를 정확하게 알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복음,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 즉, 사람을 하느님과 자기 자신과 타인과 화해시키는 은총의 소식을 전하는 데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처음부터 그는 이 복음이 유대인이라는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이고 보편적 가치를 지닌 것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여행을 출발할 때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복음은 처음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전해졌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사도 11,20.26)이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서 바오로는 우선 키프로스를 목표로 삼았고 후에 소아시아 지역(비시디아, 리고니아, 갈라티아)을, 더 나중에는 유럽(마케도니아, 그리스)을 계획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도시는 에페소, 필리피, 테살로니카, 코린토이고, 베레아, 아테네, 밀레토 등 이었습니다.

바오로의 사도직 수행에는 항상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이겨나갔습니다. 바오로 스스로 그 어려움들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과 결식,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2코린 11,23-28)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15,24.28)에서 그는 당시 사람들이 땅끝으로 알고 있는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러 갈 의향을 내비칩니다. 이런 분을 어찌 경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런 사도를 우리에게 주신 주님께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에게 절대적인 가치가 없었다면 그러한 어려움과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해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에 대해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모두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5,14-15)

사도 바오로는 네로황제 때 로마에서 순교하셨으며 우리는 그분의 유해를 공경하고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분에 대해 1세기 후반의 교황이셨던 저의 선임자 로마의 클레멘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질투와 불화 때문에 바오로는 인내를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 땅끝까지 가서 세상을 향해 정의를 선포한 뒤에 그는 통치자 앞에서 피의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내의 가장 위대한 모델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이르렀습니다.(코린토인들에게,5)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1,1)라고 하시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실천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제 2 강의 : 바오로-그리스도 중심성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난번 교리 때 저는 사도 바오로의 생애를 종합적으로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그분의 삶에 있어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음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바오로의 존재 이유가 되었고 사도직의 깊은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그의 편지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500번 이상 나오고 그 뒤를 이어 그리스도의 이름은 380번 정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한 사람의 삶에, 우리 자신의 삶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구원 역사의 정점이고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서 구별되는 점입니다.

바오로를 보면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 존재가 그리스도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어디에서 그런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바오로의 대답은 두 군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돕는 부분인데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또한 갈라티아서에서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라 2,16)라고 말합니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정의에 받아들여지고 그분과의 친교에 들어가고 모든 형제들과 더욱 진정한 관계를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용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바오로는 아주 명확하게 이러한 삶의 조건이 우리의 선행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로마 3,24)

이런 표현으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회개와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야기된 새로운 삶의 길을 설명합니다. 회개하기 전 바오로는 율법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광적으로 충실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율법으로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려 했었고 이러한 정의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방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방향을 그의 말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20)

바오로는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의로움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찾거나 세우려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놓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정의이며 주님과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방향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봉헌하면서 어느 누구도 자기가 행한 정의와 자신을 위해 행한 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는 다른 곳에서 예레미야를 따라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1코린 1,31; 예레 9,22)고 하고,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14) 라고도 합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화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삶으로 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둘째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분 안에 잠겨 그분의 죽음에 까지 동참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우리는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고 ... 그분과 함께 묻혔고 ... 그분과 결합되었고 ...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 있습니다.”(로마 6,3.4.5.11)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바오로의 특징적 표현입니다. 바오로에게 있어서는 ‘세례 받고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로마 8,1.2.39; 12,5; 16,3.7.10; 1코린 1,2.3등) 있다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 합니다. 어떤 때는 표현을 바꾸어서 ‘우리(너희) 안에 계신’(로마 8,10; 2코린 13,5) 혹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갈라 2,20)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상호적인 삼투작용은 바오로 가르침의 특징이며 믿음에 대한 그의 설명을 완성합니다. 그리스도와 긴밀히 일치해도 믿음은 그분과 우리 사이의 구분을 강조합니다. 바오로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의 ‘신비’로운 결합체(una componente)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오로는 심지어 우리의 고통을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고통’(2코린 1,5)이라고 하고,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2코린 4,10)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영적 숨결로 산 바오로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이것을 일상의 삶 안에 가지고 들어와야 합니다. 한편으로 볼 때 신앙은 찬미, 찬양하는 것이기 보다 하느님 앞에 겸손하고 항구하게 머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므로 그분과 그분의 은총에 머물러야 합니다. 아무것도 어느 누구도 그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그분께 드려야할 존경을 다른 그 무엇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우상도 우리의 영적 세계를 오염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얻은 자유를 즐기는 대신 비천한 종살이로 다시 떨어질 것입니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께 근본적으로 속하는 것과 ‘그분 안에 있는’ 것은 충실한 믿음과 한없는 기쁨을 더욱더 깊게 해줍니다. 성 바오로와 함께 우리도 이렇게 외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그리고 그 응답은 아무것도 그 누구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생각보다 더 안전하고 든든한 반석 위에 놓여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받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기쁨과 슬픔을 마주하여 경험해보며 사도 바오로 자신이 한 말이 진실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유다인 그리스도를 우리와 세상의 구세주로 만나는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2티모 1,12)

 

제 3 강의 : 바오로 -우리 마음 안의 성령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사도 바오로와 그분의 사상에 대해 살펴봅시다. 우리는 사도직에서 뿐만 아니라, 신학에 있어서도 심오하고, 놀라운 한 거인 앞에 서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고 있는 중심성에 관한 바오로의 서술들을 묵상하였고 오늘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도 대단히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성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사건을 기술하며 성령에 대해 말해줍니다. 오순절 성령은 자기 자신과 함께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는 강한 힘을 가져다줍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사마리아와 팔레스티나 해안지대와 시리아에서 완수한 선교사명의 과정을 전해줄 뿐만 아니라 바오로가 행한 세 차례의 위대한 선교 여행도 전해줍니다. 우리는 이미 이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 바오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성령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삼위일체의 제3위의 힘과 작용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과 그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특징 지워짐을 분석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바오로는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성찰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산다고 말하고(로마 8,9; 1코린 3,16) 또한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신다.”(갈라 4,6)고 한 것은 바로 사도 바오로였습니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성령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도 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전제아래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이며(로마 8, 2.15),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행동하기 전에 이미 세례와 도유의 성사로 받은 내적 풍요를 갖고 있습니다. 이 내적 풍요는 객관적이고 고유한 하느님과의 양자관계를 세워줍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엄성이며 단지 상상이 아닌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된 마음으로써 살도록 부르는 초대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큰 가정 안에 양자로 뽑힌 것을 더 잘 인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한 선물을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존재를 결정짓는 주관적인 현실 안으로 받아들이도록 부르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한 의미에서 참된 외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와 같지는 않지만 우리를 당신과 비슷한 존엄성에로 올리시며 당신 자녀로 여기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은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말하고 그리스도교의 언어적 표현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단지 <하느님의 영>(참조 창세 41,38; 에스 31,3; 1코린 2,11.12; 필리 3,3; 등) 만이 아닙니다. 또한 구약의 표현(이사 63,10,11; 시편 51,13 등)들과 유다이즘의 글들(쿰란, 랍비문학)을 따라 일반적으로 단지 하나의 <거룩한 영>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독특성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성령도 여기에 함께 참여한다는 고백입니다. 이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1코린 15,45) 바로 이것 때문에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영’(로마 8,9), ‘성자의 영’(갈라 4,6),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필리 1,19)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성부께서만 성자 안에 보여 지시는(요한 14,9)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도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삶과 업적 안에서 드러나신다고 말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바오로는 또 다른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는 우리 안에 성령의 현존 없이는 참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27) 성부와 성자의 성령은 이미 우리 영혼의 영이며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이며 거기에서 하느님을 향한 끝없는 기도의 움직임이 올라옵니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아무도 정확히 규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항상 깨어있는 성령은 우리의 가장 깊은 탄식과 함께 우리의 부족함을 위해 기도하시고 성부께 우리의 경배를 전하십니다. 우리의 깊은 숨결은 본성적으로 성령과의 생생한 친교를 원합니다. 그 친교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현존에 더 민감하게 응하고, 기도 안에서 성령을 쇄신하고, 이 현존을 느끼고, 어떻게 기도하는지 가르치고 성령 안에서 성부와 대화하도록 부르는 초대입니다.

성 바오로가 가르치는 성령의 독특한 면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의 연결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저의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저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유명한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만일 사랑을 보았으면, 삼위일체를 본 것입니다.” «Se vedi la carità, vedi la Trinità» (n. 19), 그리고 저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성령은 내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믿는 이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과 조화를 이루게 하고 그분이 그들을 사랑하셨듯이 형제들을 사랑하도록 움직이십니다.”(ibid)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삶의 리듬 안으로 들여놓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삶이고 성부와 성자 사이의 부자관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등”(갈라 5,22)이라고 하며 사랑을 첫째 자리에 놓았는데 이것의 의미는 대단히 깊습니다.

정의하자면 사랑은 서로를 일치시킵니다. 무엇보다 성령은 그리스도 공동체의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을 우리는 미사 시작 때 사용합니다. 다른 한편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이와 함께 사랑으로 하나 되도록 충동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때 성령께 자리를 드리고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시도록 해드립니다. 왜냐하면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라고 하며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로마 12,11.17)라고 하며 두 가지 권고를 접합시키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이해합니다.

끝으로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증으로서 미래에 우리가 받을 유산의 징표입니다(2코린 1,22; 5,5 에페 1,13-14). 우리는 바오로에게서 성령의 활동이 사랑과 기쁨과 친교, 희망의 위대한 가치를 향하도록 우리의 삶을 방향 지운다고 배웁니다. 성령은 우리가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따라 잘 식별하고 당신의 내적 제안들을 따르며 날마다 당신을 체험하기를 희망합니다.

 

제 4 강의 : 바오로- 교회 안의 생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 바오로와의 만남을 마무리하며 그분에 대한 마지막 묵상을 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 업적의 결정적인 한 부분이며 그분 사상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인 ‘교회’를 다루지 않고서는 이 묵상을 마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오로가 예수님의 인격과 처음 만난 것이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증거를 통해서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매끄럽지 않은 만남이었습니다.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알고 그는 곧장 사나운 박해자가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스스로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1코린 15,9; 갈라 1,13; 필리 3,6)라고 세 번이나 시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나쁜 죄악으로 인정하는 듯합니다. 역사는 그가 교회를 통해 평범하게 예수님께 일치한 것처럼 보여 집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사실이며 우리는 바오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교회를 만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만남은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폭력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바오로가 교회에 일치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개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하시고,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주님을 박해하는 것임을 인식시켰습니다. 부활하신 그분은 교회의 박해자인 바오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 그는 교회를 박해하면서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입니다. 바오로가 회개 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 뿐 아니라 교회를 향해서도 동시에 회개 한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는 바오로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 안에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간 도시 마다 그는 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모든 교회를 위한 그의 염려(2코린 11,28)를 말할 때 그는 갈라티아, 이오니아,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등 다양한 곳에서 속속 일어나고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교회는 그에게 선입견과 불쾌함을 내비쳤는데, 예를 들어 갈라티아 교회에 갔을 때 그는 ‘다른 복음으로 돌아선’(갈라 1,6)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것에 대해 아주 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이 세운 교회에 차갑거나 사무적인 것이 아니라 강하고 뜨겁게 연결되어있음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필리피인들을 말할 때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4,1)이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공동체에 독특한 추천의 편지를 주었습니다. “우리의 추천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진 이 추천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며 또 읽을 수 있습니다.” (2코린 3,2) 또 어떤 때는 아버지로서만이 아니라 어머니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수신인들에게 충고하면서 “나의 자녀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나는 다시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갈라 4,19; 1코린 4,14-15; 1테살 2,7-8)라고 했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교회에 관한 자신의 교의를 보여줍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교회에 관한 그의 근본적 정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것은 1세기의 다른 그리스도인 저술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1코린 12,27; 에페 4,12; 5,30; 코로 1,24) 교회에 관한 이 놀라운 정의의 깊은 뿌리를 우리는 성체성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말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1코린 10,17). 이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몸이 되게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에게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바오로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속한다는 것 뿐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와 동일한 존재로서 하나의 구체화된 형태임을 알게 해줍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위대함과 고귀함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러한 교회의 한 부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는 그분의 세상안의 인격적 현존의 연장입니다.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와 일치한 삶을 살아야할 우리의 의무가 자연스럽게 뒤따르며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고 이끌어가는 다양한 은사의 목적에 대한 바오로의 권고가 나옵니다. 모든 은사는 하나의 유일한 원천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의 영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7)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은사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 함께 작용하는 것이지 상처를 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목적으로 바오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1코린 1,13) 그는 사정을 잘 알고 우리에게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3-4)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일치의 요구를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삶이 한 가지 형태로 획일화 내지 평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 바오로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합니다. 즉, 성령 은사의 표현이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에 관대하게 여지를 둘 것을 요청합니다.

성령은 항상 새로운 생명력과 에너지의 샘입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가 가진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함께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1코린 14,26). 멈춤도 없고 흩어짐도 없고 갈라짐도 없이 모두는 교회라는 직물을 아름답게 짜는데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또한 바오로의 한 편지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에페 5,21-33)로 설명합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계약의 하느님의 신부로 여겼던 옛 예언자들의 비유(호세 2,4,21; 이사 54,5-8)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지를 말해줍니다. 교회는 주님 측에서 볼 때 따뜻한 사랑의 대상이고 사랑은 상호적이어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분 앞에서 뜨거운 충실성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친교는 하나의 관계입니다. 수직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이고 수평적으로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에’(1코린 1,2) 세상에서 구분되는 모든 이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identità)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 속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원했던 바를 잘 이해합시다. “모두 예언하는데 믿지 않는 이나 초심자가 들어온다면, 그는 모든 이에게 질책을 받고 그 모든 이에게 심판을 받게 됩니다. 또 그 마음속에 숨겨진 것들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그는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절하면서, “참으로 하느님께서 여러분 가운데에 계십니다.” 하고 선언할 것입니다.”(1코린 14,24-25) 이것이 우리의 전례 안에 있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이가 우리의 모임에 들어오면 나중에 이렇게 말하게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우리들 상호간의 친교 안에서 주님께 기도 합시다.   

<본 강의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2006년10월25일~11월22일 까지 매주 수요일 4회에 걸쳐 행한 ‘사도바오로’에 관한 교리 내용을 서울대교구 사목국 선교전례사목부에서 번역한 것입니다.>